‘에코 樂 갤러리’ 판매작품리뷰입니다.

[Sold/엄마나무- 김현기作]

에코락갤러리 대표 장현근 | 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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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나무

김현기作

116.8cm * 91.0cm (50호)

Oil on canvas, 2021

5,000,000

 

[Sold/엄마나무- 김현기作]
아담과 이브의 사과...뉴턴의 사과...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사과...마직막으로 인류사의 유명한 사과의 범주에 드는 세잔의 사과가 있습니다.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는 사과들인데 세잔의 사과는 미술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죠.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사를 관통해 왔던 소실점이 하나인 일시점 원근법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근법의 시초는 르네상스 콰토르첸토 시기의 거장 마사초(1401년~1428년)가 3년 동안 (1425년~1428년) 작업한 산타 마이라 노벨라 성당의 '성삼위일체'입니다.또 다른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 화가 파올로 우첼로(1397년~1475년)도 세상을 등지고 원근법 연구에 몰두하며 메디치 가문의 주문으로 <성 로마노 전투;1438년~1440년>를 그리지요.
당시 원근법의 등장은 단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작법을 넘어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신과 인간...그리고 계급과 신분에 따라 이분법적 논리로 주된 대상을 크게 그리거나 앞쪽에 배치되는 구도를 전복하고, 누구든지 눈에 보이는 대로 앞쪽에 위치해 있는 인물을 크게 묘사되는 구조이니 논란의 대상이 되긴 충분했습니다. 여하튼 이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일시점 원근법은 세잔이 사과를 그리기 전까지 마치 절대불변의 자연법칙처럼 수세기 동안 서양 미술사를 관통해 왔죠.그걸 세잔의 다시점이자 원근법이 무시된 사과가 전복시킨 겁니다.
이보다 한참 앞선 11세기 북송의 곽희는 이런 일시점 원근법에 반하는 인간 중심의 3차원 세계 포획방법에 대한 작법을 논합니다.바로 삼원법인데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자연의 재현 아닌 체험을 기억에 의존하여 그리기 때문에 다시점이 한 화면에 다 묘사되는 것이지요.이중 고원(高遠)은 아래에서 위로,심원(深遠)은 산 앞에서 산 뒤를 굽어서 내려다보고,평원(平遠)은 가까운 산에서 먼산까지 표현합니다.눈에 의한 일시점 보다 기억에 의한 다시점를 그린셈입니다.동양에서는 세잔보다 다시점이 800여년 앞서 등장했군요.
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나 풍속화의 단원 김홍도는 세잔보다 100여년 전에 이미 작품에 다시점을 적용했지요. 특히 정선의 금강산에 관한 그림은 위에서 내려다 보고 그린 부감법으로 유명합니다.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일시점의 원근법과 이것을 무시한 다시점의 간의 우열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다만 작가의 실재와 상상을 융합하거나, 혹은 교차해서 표현하고 묘사하는 데에는 일시점 원근법 보다는 다시점이 유리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파리 근교에 있는 바르비죵처럼 시흥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작가 김현기의 작품 <엄마나무>는 어릴적 어느집이나 있음직한 고목에,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투영한 작품입니다.실재와 상상이 혼재된 추억을 표현하기 위해서 부감법과 일부 정면을 그려 단박에 집안을 한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게 한점이 탁월합니다.늘 그렇듯이 고향집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작가의 눈만 새가 되어 날아 오르며 보이는 장면을 한 화면에 그렸습니다.고향인 지리산 산청에 시인인 어머니를 위해 문학관을 짓고 작품을 전시할 성공한 사업가에게 소장 되었습니다.이렇듯 미술은 효도의 매개체가 되어 숭고한 의무를 천세를 이어 다합니다. *작가 노트

뒷뜰에는 무화과 나무가 지천이다. 엄마는 오늘도 목포역 근처를 헤매고 있다. 광주리 가득 무화과는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마당 앞 커다란 나무는 이파리가 거의 붙어있지 않다. 나무 아래 붉은 천일홍이 길게 피어있고 그 옆에는 마중물을 기다리는 작두샘이 있다. 그곳에 보이지 않는 엄마가 있다. 다 비우지 못한 광주리 이고 캄캄한 막차로 돌아오는 한 여인의 넋두리가 앞마당 고목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다.